2·28의 시대적 배경
1960년의 한국은 참담했다. 십 수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몰아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이승만을 대적할 유일한 대안으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제 당시 86세 고령이었던 이승만 나이를 감안하면 대통령 유고시 권력승계자인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것이 자유당 정권 최대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강력한 야당 부통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으로 인해 자유당의 이기붕은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대구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야도(野都)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따라서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에는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2·28의 발단 - 민주주의를 위한 한 알의 불꽃!
2·28민주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당국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일요일 등교의 명분은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이었다.
학생들은 일요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각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속고 등의 학생들이 모여 부당한 일요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발췌 www.228.or.kr/f...
Негізгі бет 대구 228 민주운동 Daegu's 228 Movement for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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