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2018년. 서울 출생
원래 본명이 최성준이지만, 개명해서 본명도 최희준으로
경복고, 서울대학교 법대 행정학과(55학번). 대학 재학 중 교내 축제에서 부른 노래로 주목을 받아 1959년 졸업 후 본격적인 가수 활동 시작. 미8군쇼에서 무대 활동을 하다가 1961년 비너스레코드에서 음반 데뷔
군복무로 인한 공백(1964년 2월 전역)이 있긴 했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톱 가수로 활약
1. 학사가수 대표주자: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손석우 사·곡, 1961년)
비너스레코드에서 데뷔한 학사가수의 아이콘, 최희준과 김상희
2. 미8군쇼: 내 사랑 쥬리안(손석우 사·곡, 1962년)
한국의 냇 킹 콜
3. 방송과 영화 주제가: 맨발의 청춘(유호 사, 이봉조 곡, 1964년)
1960년대는 최희준의 시대인 동시에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의 시대
4. 1960년대 유명 스탠더드팝 작곡가들과 모두 작업: 빛과 그림자(길옥윤 사·곡, 1966년)
손석우에서 시작해 작곡가의 폭이 점차 확대. 김호길(진고개 신사), 이봉조(맨발의 청춘), 한동훈(옛 이야기), 홍현걸(엄처시하), 서영은(노신사), 심지어 길옥윤(빛과 그림자)까지
5. 초대 가수왕: 하숙생(김석야 사, 김호길 곡, 1966년)
1965년 제1회 방송가요대상 가수상, 1966년 제1회 10대가수청백전에서 모두 최고 인기가수로 선정. 1966년 당시 수상곡이 하숙생
6. 최고의 학벌+노래로 형성된 서민적 풍모: 엄처시하(김석야 사, 홍현걸 곡, 1965년)
아마도 그 덕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전무후무한 이력
7. 가창의 영향력?: 가장무도회(심영식 사, 황문평 곡, 1967년), 태양(이봉조 사·곡, 1968년)
최희준 스타일의 가창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지만, 남인수나 현인처럼 선명한 계보가 드러나지는 않는 편. 남진 정도?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서 1960년대에 함께 활동했던 스탠더드팝(혹은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을 오가는) 스타일의 남자가수 남일해와 오기택 등을 포함하여 한꺼번에 보면, 모두 최희준 부류의 가창. 즉 일제강점기 남인수와 백년설, 1950년대의 현인과 또 다른 1960년대 스탠더드팝을 대표하는 남자가수의 가창(저음, 부드러운 목소리)이 이 시대에 확립됐고, 그중 최고의 가수가 최희준이었던 셈. 특히 맨발의 청춘스타일의 남성적 분위기의 노래에서 최희준의 가창은 전범이라 할 만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 후반에는 최희준 가창에서 남진을 연상케 하는 젊은 질감의 가창도 발견된다는 점
Негізгі бет 대중가요의 역사 - 가왕열전 5편 최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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