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공세가 주공단 이야기 보다가 복습하는 의미로 은본기2편부터 주본기까지보고 다시 주공단 이야기로 갈려고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
@똥광-l5f
4 жыл бұрын
재밌네요♡감사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
@antimoon5273
4 жыл бұрын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박정홍-s6m
4 жыл бұрын
유익한 강의 감사 드립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kingkaart6802
4 жыл бұрын
낭낭한 목소리로 흐르는 듯한 역사의 전개는 들을수록 빠져들어 다음이야기가 기대됩니다. 특히 사기의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풀어지는 이야기는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훈스-l2g
2 жыл бұрын
선생님 은나라 계보는 어느책에서 찾을 수 있나요?
@Yeokg
2 жыл бұрын
계보는 인터넷 자료에서 검색했습니다. 또한 사기본기 내용에 차례로 정리되어 기록되었습니다.
@버팔로-t4u
4 жыл бұрын
복습하는미음으로 경청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THOMAS-ep5pl
4 жыл бұрын
선생님 강의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요즘 선생님 덕분에 선진,전국시대에 부쩍 관심이 많이가서 중드 대진제국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즐거움 가득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삶바른
2 жыл бұрын
0:50 BC1600~BC1046 1:30 BC1300년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 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 부르게 되었음
@Yeokg
2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
@Sunnypedia
4 жыл бұрын
저는 서양정치철학 전공이지만, 최근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많이 갑니다ㅡ 우연히 좋은 채널을 발견하게 되어 기뻐요! 앞으로 많이 배울게요 😃 유익한 내용 기대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thesanctuary225
4 жыл бұрын
서양철학도 철학인가요? 너무 수준이 낮지 않나요? 철학은 역시 동양철학이죠.^^
@관악수나문
4 жыл бұрын
저 까마득한 시절에 저렇게 세세하게 임금들의 유형을 나누어 정리할만큼의 표본이 있었다는건 이미 그 전에도 기록이 전해지지 않은 임금들과 스토리가 상당히 많이 있었나 봅니다 ㅠㅠ
@YoungsupBaeehnneo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THOMAS-ep5pl
4 жыл бұрын
부열 같은 경우는 노예등용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고 무정이 헐리우드액션을 하는 수를 낸것이겠죠? 부호의 묘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니까. 정말 완벽하게 발굴되었다네요. 감사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네 저도 감사합니다 😊
@thesanctuary225
4 жыл бұрын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 한반도에 정착해서 살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
@jefflee4566
4 жыл бұрын
이 당시의 상나라 하나라가 천자란 개념으로 스스로를 칭할수 있었는지요? 우리의 환웅이나 단군시대와의 비교할 수있는 시대인지 궁금합니다.
@ysng-yz7xe
3 жыл бұрын
중국역사는 고조선의 역사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2000년전 의 요하의 홍산문화가 있었고 그 홍산문화를 고조선이 이어받은 유물 유적이 나타납니다
@풍이-m2k
2 жыл бұрын
사기에 황제헌원은 환웅의 운사 라고 나와 있답니다.
@향희-l9u
4 жыл бұрын
흥미 있는 중국고대사 입니다.감사 합니다.
@Yeokg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몰람-u6e
4 жыл бұрын
상왕조 하왕조는 실존한 나라인가요?
@Yeokg
4 жыл бұрын
상왕조는 유물로 입증된 역사입니다. 하왕조는 후대 역사가의 기록으로만 남았는데 아직 증거가 될 유물이 없어서....
@sweetfan3250
3 жыл бұрын
중국 상고역사는 동이의 역사죠.은.상.주는 그런것 아닌가요.한 무제는 한족통일이고.삼황오제는 우리 역사라 알고 있지요.요.순임금.오제또한
@비룡당근
2 ай бұрын
상나라는 갑골문과 은허 발굴로 실존했던 나라라는게 밝혀졌지만 하나라는 아직입니다
@문영아-m5b
4 жыл бұрын
2020🍹2🍸11 굿.🍷🍾🍮🍭🍧.
@y2k2000y2k
2 жыл бұрын
탕 임금과 이윤의 관계 설정에만 집중하고 걸과 탕의 교체기에 군사적 움직임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홍범구주의 전수자인 부루태자 그리고 흘단단군의 군사적 움직임속에 흉노란 나라가 언급되지만 현재의 서안 지역 서쪽지역에 빈 기 라는 관청이 들어서는 기록으로 봐서는 하 은 의 교체기는 고조선의 역활이 가장 큰것이고 이 군사적 역활로 국가가 교체 되었다면 하 은 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분국임을 나타내는것 아닌가.은나라가 무슨 제후국들이 있어서 하나라를 친단 말인가.구이족 군사외에 낙랑이 함께 기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국가가 있지만 지금 기억이 안나서 올릴수는 없지만 은나라의 성립이 이떻게 이윤의 공로로만 끝날수가 있나.고조선의 군사적 움직임을 감추기위해 흉노란 종족을 끼워 넣었지만 걸을 정벌하고 부루태자의 홍범구주의 전수와 또 빈 기라는 관청이 설치된것은 고조선의 역활이다. 흉노란 종족이 마치 구이의 군사를 일으킨것처럼 착각되지만 이후의 역활에서 보면 고조선임을 분명하게 알수가 있는것 아닌가. 이러한 사실들이 역사교육에서 계속 빠지고 일어나는 현상이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한반도 남부의 임나일본부설을 계속 가능케하고 왜곡질이 계속 일어나는것 아닌가.한반도 남부에서의 전방후원분의 발견이 일본의 고분들보다 앞선 시기에 것으로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이 깨진것인데 최근에 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임나일본부설이 버젓이 전시되는게 말이 되겠나.일본의 유적과 유물 그리고 남아있는 사찰들이 오히려 열도가 삼국의 분국 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게 아닌가. ○丙午/遣藝文館學士韓尙質如京師, 以朝鮮、和寧, 請更國號。 奏曰: "陪臣趙琳回自京師, 欽齎到禮部咨。 欽奉聖旨節該: ‘高麗果能順天道合人心, 以(妥) 東夷之民, 不生邊釁, 則使命往來, 實彼國之福也。 文書到日, 國更何號, 星馳來報。’ 欽此切念小邦王氏之裔瑤, 昏迷不道, 自底於亡, 一國臣民, 推戴臣權監國事。 驚惶戰栗, 措躬無地間, 欽蒙聖慈許臣權知國事, 仍問國號, 臣與國人感喜尤切。 臣竊思惟, 有國立號, 誠非小臣所敢擅便。 謹將朝鮮、和寧等號, 聞達天聰, 伏望取自聖裁。" 初上欲遣使, 難其人, 尙質自請曰: "臣雖乏專對之才, 敢不敬承上命, 以効寸忠!" 上說。 이기록은 우리가 가진 기록이고 이 기록은 왜곡되어 후학들에게 가르쳐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진 내용이다. 조선이란 국호를 어느 나라로부터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한다. 이 기록을 두고 강단과 학계 교육부가 진실을 말해 줄수가 있을까? 경도(京都) 경성(京城)이란것은 일반명칭인 수도로서 어디인지를 쉽게 가늠할수는 없지만 경사(京師)는 움직일수가 없는 고유명사이다.지역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는 단 하나의 이름이다.우리가 가진 기록이나 중국측이 가진 기록으로 단 하나의 이름이고 단 한곳의 지역이다. 동음이어. 한자가가진 특성중 하나가 같은 소리여도 고유한 이름엔 같은 글자를 쓸수가 없다는점이 가장 큰 특색이지 않은가.
@김성태-b9r7h
Жыл бұрын
구려와 같은 시기에 기억되지 않는 나라는 아마도 동호인것 같른데 어떠신지요? 그리고, 그 아래에 쓰린 경사관련 한문 원전은 혹시 이씨 조선의 실록 같은데 왜 여기 실어놨는지?
@y2k2000y2k
Жыл бұрын
전체적인 취지는 현재 우리와 전혀 다른 별개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중국을 말하고 있는 역사관을 지적하고 싶은겁니다. 한걸은탕 교체기에 이윤의 역활이 군사라는 참모역활이겠지만 구이족 군사의 움직임과 빈 기 관청 설치는 하나의 사건들의 연장선들입니다. 그러면 하 은(상)은 당연히 고조선의 분국으로 볼수밖에 없는 하나라 은(상)나라입니다. 이런 관점을 대륙에 시선을 두라고 말하는것이고 대표적으로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란 국호를 하사 받았다는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록을 보여줌으로서 고려와 조선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임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관련 기록들 어디에도 하사 받았다는 그런 측면의 기록들은 없습니다.조선이란 국호가 합의로 장해졌다는건 기록들을 뒤져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기존의 역사는 폐기 되어야만 합니다. 경도와 경성 경사를 말했지만 경사는 중국측 기록들이나 일본측 기록 그리고 우리가 가진 기록으로는 한곳을 가리킬 뿐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기존의 한반도 강역고로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것이지만 청나라이고 만주국이였던 19세기 당시를 볼수있습니다. 이것이 조선임을 말 할려고 기록을 찿아 보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9번째기사동북면을 공격하고 나하추 등이 있는 곳에 방을 붙여 기새인첩목아의 행방을 탐문하다 奇賽因帖木兒, 本國微臣, 昵近天庭, 過蒙殊恩, 位至一品, 義同休戚。 天子蒙塵于外, 義當左右先後, 効死勿去。 爾乃背恩忘義, 竄身東寧府, 挾讎本國, 潛圖不軌。 年前國家, 遣兵追襲, 逃不血刃, 又不赴於行在, 退保東寧城, 與金伯顔平章等, 結爲心腹, 松甫里、法禿河、阿尙介等處, 團結軍馬, 又欲侵害本國, 罪在不原。 故今擧義兵以問, 乃其賽因帖木兒、金伯顔等誘脅小民, 堅壁逆命。 哨馬前鋒, 生擒金伯顔外哈刺波豆、德左不花高達魯花赤、大都摠管等大小頭目, 盡行勦捕, 賽因帖木兒, 又復在逃。 仰賽因帖木兒去接各寨, 卽便捕捉飛報。 如有隱匿不首者, 鑑在東寧。 기새인첩목아(奇賽仁帖木兒)는 본국(本國)의 미천한 신하로서 황제의 조정에 친근(親近)하여 별다른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관위(官位)가 1품(品)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나라와 함께 기쁨과 근심을 같이해야 될 것이며, 천자(天子)가 밖에 피난(避亂)했으니, 의리상 마땅히 전후 좌우에서 보좌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고 가버리지 않아야 될 것인데, 그는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잊고서 동녕부(東寧府)에 몸을 도망쳐 와서, 본국(本國)에 원수를 가지고 몰래 모반(謀反)을 도모하고 있다. 두서너 해 전에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뒤쫓아 습격했으나, 도망하여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데, 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물러와 동녕성(東寧城)을 지키면서, 김백안(金伯顔) 평장(平章) 등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이 되어 송보리(松甫里)·법독하(法禿河)·아상개(阿尙介) 등지에서 군사와 말을 단결(團結)시켜 또 본국을 침해하고자 하니,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니, 그 새인첩목아(賽仁帖木兒)와 김백안(金伯顔) 등은 소민(小民)들을 유혹 협박하고 성벽을 굳게 지켜 명령을 거역[逆命]하므로, 초마(哨馬) 전봉(前鋒)이 김백안 외에 합라파두(哈剌波豆)·덕좌불화(德左不花)와 고다루가치(高達魯花赤)와 대도총관(大都摠管) 등 대소 두목(大小頭目)을 모두 잡아 죽였으나, 새인첩목아는 또 다시 도망 중에 있으니, 새인첩목아가 가서 접(接)하는 각채(各寨)에서는 즉시 잡아서 빨리 보고할 것이며, 만약 이를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戒)가 동녕부(東寧府)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東寧城戰鬥 播報 鎖定 上傳視頻 東寧城戰鬥,1933年9月9日在東寧縣城發生的戰鬥。 1933年9月9日,中國共產黨領導的吉林省汪清、琿春反日遊擊隊聯合救國軍吳義成部,反日山林隊金山、三俠等部共2000餘人攻打東寧縣城(今屬黑龍江省)。 東寧城有日軍500餘人和部分偽軍防守,城四周築有炮臺,城外挖有水溝,並設有鐵絲網,工事比較堅固。 淩晨3時許,由汪清、琿春反日遊擊隊與共產黨員史忠恆率領的救國軍抗日遊擊總隊第3團(後編入東北抗日聯軍第2軍)組成的「炸彈隊」首先攻入城內,但因攻城部隊指揮不統一,山林隊及救國軍在守城日偽軍的猛烈反擊下受阻,有的向後撤離。 攻入城內的部隊孤軍作戰,至中午12時,被迫撤出戰鬥。 此次戰鬥斃傷日偽軍40餘人。 發行者:中國軍事百科全書編審室 [1] 동녕성 전투 신문을 방송하다 잠깁니다 동영상을 업로드합니다 1933년 9월 9일, 둥닝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933년 9월 9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지린성 왕칭과 훈춘 반일 게릴라 합동 구국군 우이청부, 반일산림대 진산, 삼협 등 총 2000여 명이 동닝현 성(현재 헤이룽장성)을 공격했다. 동닝성은 일본군 500여 명과 일부 위군 수비, 성 주변에 포대 건설, 성 밖의 물골 발굴, 철조망 설치, 요새가 비교적 견고하다. 새벽 3시경 왕칭, 훈춘 반일 빨치산, 공산당원 시충항이 이끄는 구국군 항일유격총대 3연대(이후 동북항일 연합군 2군에 편입)로 구성된 폭탄대가 먼저 성 안으로 들어왔지만 공성부대 지휘가 맞지 않아 산림대와 구국군은 수성일위군의 맹렬한 반격에 막혀 뒤로 철수했다. 도시에 침입한 군대는 낮 12시까지 전투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번 전투는 일본 위군 40여 명을 사살했다. 발행인: 중국 군사 백과 사전 편집실 [1] 1928年的东宁城老照片,宁古塔以东,海参崴以西 本组照片刊发于《亚细亚大观》,日本摄影师拍摄于1928年。东宁于清末设治,以其地居宁古塔东部而得名。日文图片说明:东宁别名三岔口,东部与俄国接壤,是一个重要的商贸城。离珲春东北约270里,绥芬河南约140里,宁古塔约400里。图为在中俄边境遥望东宁城。 번역 ::무 (((1928년 일본 사진작가가 촬영한 아시아 대관에 실렸습니다. 동녕은 청나라 말기에 통치를 하여 그 땅이 닝구탑의 동쪽에 거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출처::백도백과 이 기록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들을 찿다보면 기존의 역사인 압록강 이남 한반도 조선이 도저히 점유 할수 없는 곳입니다. 화(華) 와 이(夷)를 통일하고 또한 원을 흡수 통합 했다는걸 여러 기록들로 확인할수 있습니다. 원을 흡수했다고 하니 미친소리로 들으시겠지만 문연각을 통하면 그런 결론을 자연스럽게 내릴수밖에 없습니다. 문연각 기록물은 현재 대만에 있는것으로 압니다.이 문연각을 조선시기 내내 왕과 신하들이 기록물을 가지고 예법과 현실 정치를 하고자 들먹이는 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기록속에 이 모든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장황하게 여러가지를 쏟아 냈지만 직접 찿아보면 충분히 이해 하리라 봅니다.
Пікірлер: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