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이야기』강의에 들어가면서...
'있음'과 '없음'의 문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까닭에 눈으로는 사물을 인식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습니다.
추위와 더위도 분별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엄밀한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척이나 중요한 인간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이 '우리가 여기 있음'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여기란 과연 어디입니까?
'있음' 이란 과연 무엇이며, '없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함꼐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 이 글의 근본취지 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음'의 진실이란
새삼스럽게 알려고 하는 순간에는 잡히지가 않습니다.
분명하게 제시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눈과 귀조차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도 나타낼 수 없으며,
어떤 이름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음'이란 참으로 이러합니다.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달마(達磨) 스님 (?~528)을 만나서
문답을 나누던 때의 일입니다.
무제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달마 스님은 "모른다〔不識〕."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한 존재의 실상을 달마 스님 자신이 모른다는 뜻인지,
아니면 무제가 모른다는 뜻인지는 우리 자신 역시 모릅니다.
달마를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 모릅니다.
무엇이 여기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우리는 분명하게도 여기에 이렇게 있습니다.
그 '있음'에 대하여서는 달마도 무제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 살 먹은 아이라고 할지라도 자진의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그 '있음'이란 그저 미미하게 있는것이 아닙니다.
저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저 허공보다도
더 먼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있었으며,
끝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 합니다.
즉 모든 삼라만상을 있게 하면서 그도 더불어 함께 늘 있는 것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있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실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기도 하면서 없기도 한 것인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인가.
그것이 '있음'과 '없음'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불교에 있으니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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