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궁예 =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로 희화화 되어 버린거 같은데, 청화수님 컨텐츠 덕분에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요. 감사합니다.
@user-xx5nw7uo8f
4 жыл бұрын
궁예 일련의 영상 잘 봤습니다. 통일신라에도 무역선과 조운선은 당연히 있었겠지요. 고려조선처럼 남에서 북이 아닌, 서에서 남을 거쳐 동으로 가는. 궁예는 아마도 진짜 신라 왕족이든 아니든 이 남부세력 의해 쉽게 쿠데타가 일어나는 신라의 시스템에 환멸을 느꼈고, 이를 태백산맥 김주원계 세력과 뜻을 함께 한거로 보입니다. 그에 반해 왕융과 패서지역의 호족들은 남부세력의 성세를 인정하고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전시에 있어서 자원과 환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 중동전쟁의 원인은 원유 때문이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이는 동서고금 다 마찬가지일텐데, 동양사 특히 한국사에서는 자원과 환경의 중요성은 경시 되거나 승자 혹은 군주의 타고난 역량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근대 이전 최고의 자원은 식량, 목재, 금속 이었습니다. 식량은 남부지역이 기온 평야 강수량이 적절하기 때문에 중부에 부족하지 않았겠지만, 후삼국시대 남부와 중부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목재에서 차이가 났다고 봅니다. 나무가 있어야 수레, 선박, 목책을 만들 수 있고, 쇠를 녹이고, 도자기와 전축을 굽고, 궁궐과 도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민둥산이었던 우리나라의 실정 상, 후삼국 시대에도 평지의 나무는 이미 그 쓰임을 다하였을 것이고, 큰 나무라야 깊은 계곡에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구한말까지 왕실과 지역 유지의 저택은 태백산맥 골짜기의 목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궁예는 남한강 북한강 임진강 상류에 강한 연고가 있던 사람으로써 왕융 왕건 부자도 초기에는 궁예에게 귀부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수년간 강 상류의 목재가 강 하구로 옮겨 와 선박을 만들고 요새를 만들고 송악을 개발하고 난 뒤에 왕건의 쿠테타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백제지역은 이미 청해진에 큰 목재들이 사용되었고, 신무 민애 전쟁 시 상당수 소진 되어 대목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완도 청해진 자리에 가 보시면 목책 유적들이 즐비합니다. 거대한 목책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뜬다리나 선박 또한 굉장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화원반도 내해측에서 발견된 엄청난 크기의 나주선 저판재는 목재가 남부보다는 중부의 목재로 추정 된다 합니다. 아마 왕융 왕건 부자는 궁예의 힘을 빌어 송악 주변에 청해진 같은 요새와 선박을 생각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해상 요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암살이 아닌 전쟁이었다면 문성왕은 장보고에 승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Mintchoco_lover
4 жыл бұрын
정우형 와우👍🏻
@user-uj9lr5je3w
4 жыл бұрын
항상 좋은..내용 알려주셔서 감사히 듣고 잇습니다
@user-kg6bo9pq2r
4 жыл бұрын
오호~~마지막 정말 와 닿아요.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user-pd9fm7oz6r
4 жыл бұрын
후삼국의 궁예, 결국 패배자라 패배자로서 묘사되어지는 각색들만 접하게 되는데 각자 자유로운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 궁예 시리즈.. 재미있게 봤습니다~~^^
@user-eg7cr8ml1r
4 жыл бұрын
후삼국 시리즈 너무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user-fb8xl7lt4o
2 жыл бұрын
역사 추리 너무 재밌어요^^
@89_Frames
4 жыл бұрын
소서노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너무 잘듣고 있어요 ㅋ
@SHNIRO817
4 жыл бұрын
화수형 원래 자장가로 들었는데 너무 빨라요 잠이 안와유
@jih3629
4 жыл бұрын
거울에피소드 왕건드라마기억나네요. 일부 삼국지차용 잇긴하지만 은근 사료기반내용들이네요
@st9ve986
4 жыл бұрын
마무리하는 말들이 주옥 같네요 정말 감사하게 듣고 즐겼습니다
@spitz2
4 жыл бұрын
잘듣겠습니다!
@user-fs2yj6vi3s
4 жыл бұрын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catbrostv5345
4 жыл бұрын
초창기때부터 계속 시청하고 있습니다 ㅎ 역사속의 이러저런 이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고오급 정보 ㅎ
@kh1118
4 жыл бұрын
약 1년전 쯤 우연히 청화수님의 영상을 보고 구독하게 된 1인 입니다. 역사라는 기록을 다른 시각으로 보며 더 재미있는 이야기, 혹은 몰랐다라는 이유로 간과했을수도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심에 영상이 올라올때마다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기승인데 건강관리 잘 하시고. 언젠가 시간이 되신다면 효종의 북벌에 관한 준비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user-ttyu
4 жыл бұрын
고려말기 조선건국 단계처럼 장시간 준비를 거쳐 고려가 건국된듯 합니다 우왕을 노비의 소생으로 주장하듯 궁예도 패자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으니
@user-qz7cw7lz9b
4 жыл бұрын
궁예가 왕건에게 고려를 선양했다는 설도 있고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많습니다
@user-ic7iu9pe3m
2 жыл бұрын
지금두 정치인ㆍ공무원 진짜 마구니들 많다
@user-4109
4 жыл бұрын
궁예 역사도 왕건 지 좋은쪽으로 한게 분명하지
@user-py7mi8lr7w
4 жыл бұрын
역사는 이긴자에 의해 쓰여지죠.
@user-ic7iu9pe3m
2 жыл бұрын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에요
@hyeoklee2776
4 жыл бұрын
궁예에 완전 꽂히신거같네요ㅠㅠ
@user-qz7cw7lz9b
3 жыл бұрын
맞아죽은건 솔직히 에바고 ,,,궁예가 왕건에게 선위한거 같은데,,,,
@stan_ms
4 жыл бұрын
와 화수형!
@user-zx5sf5wi7b
4 жыл бұрын
누구인가? 누가 경제를 파탄 내었는가
@interactiveno1
4 жыл бұрын
글감사합니다
@user-tb2id7wf1i
Жыл бұрын
대조영에 관한 예기도 올려주세요
@danielp2399
Жыл бұрын
전방에서 근무해보신 분들은 철원을 수도로 정한 궁예가 미친게 맞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user-mm3gw2vd8l
9 ай бұрын
왕창근이 햇볕드는 곳에 거울을 걸어 놓자...청목은 송악 흑금은 철원을 뜻하다......드디어 이 거울은 궁예에게 바쳤는데 ...신하들은 당의 상인이 왕건이 왕이 되리라는 말까지 궁예에게 전할 수 없었으며........모든 세력들은 대부분 궁예를 싫어하고 왕건을 좋아하였고....따라서 궁예정권에서는 우리가 크게 득볼 일은 없겠다라며 내란을 계획하였다는 .......궁예는 미복으로 도망치다가 산에 2일을 숨어지내다 내려와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들켜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끝까지 풀리지 않은 문제는 궁예가 내란의 소식을 듣고 싸워볼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도망칠 정도로 약한 조직이 아니었는데 왜 내란을 진압하지 않았을까?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왕건측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게 아니냐?라는 추측이 가능한 정도로 의심되는 부분이다.......민간에서 전해지는 말은 궁예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세가 왕건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음을 알고 왕건에게 왕위를 선양했다는 이야기.......궁예가 마지막까지 왕건과 혈투를 벌이다가 산 속으로 피신하니 산천이 서러워 울어 그 산이름이 명성산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소식들......우리 역사에 민중 출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가처럼 이렇게 왕위에 오른 인물이 극히 드물었다는 ......늘 건강하시길.......3👍👍👍👍
@user-pq5in6hp1s
4 жыл бұрын
제 관점으로 보자면 우선 궁예는 베이스가 강원도의 명주 (현 강릉)이고 점령전 끝에 황해도의 송악(개성)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을 하게 되죠. 송악의 유력 호적인 왕씨의 어두운 속내를 간파하지 못하고 개경에 수도를 두었다가 자신의 창업공신 세력인 강원도 수하들과 어떠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과 현 개경 세력을 아우름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중간지점인 철원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두 세력간의 알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은 개경세력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wooyoungkim2925
4 жыл бұрын
얼핏..구원파의 유병헌 같은 스토리지만, ..아무튼 졸~~ 재밌어요.
@xelnagak3458
4 жыл бұрын
궁예가 숙청을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패서호족들의 경계를 샀고 통일조차 완수하기 이전이라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장개석이 일본과 전쟁하던 도중에 내부의 적인 공산당을 숙청하려고 시도했기에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마오에게 명분에서 밀려서 결국 국공합작까지 했어야됬죠 결국 대만으로 쫓겨났구요 마찬가지로 아직 후백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왕권강화를 위한 내부숙청은 호응보단 호족들에게 의아함과 반감만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후백제와 신라를 합병한 이후에 통일왕국에 맞는 제도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왕권에 위협이 되는 호족들만 골라 내부숙청을 감행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jjames7578
4 жыл бұрын
훤칠
@user-iw6pc9cy2q
4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hykim4975
4 жыл бұрын
흥미로운 내용 감사합니다. 다만 사람이나 산 등등을 단순히 네모 박스로 두지 마시고 픽토그램 같은 간단한 이미지로 두시면 어떨까요?
@user-sg5dt8ue4s
4 жыл бұрын
라디오 처럼 들어도 좋아요 ㅎ
@user-kw3bm8gk5m
Жыл бұрын
드라마 "왕건"을 보게되면 궁예의 죽음이 많이 각색됐다는 얘기인가요?🤭 ㅋㅋㅋ ㅋㅋㅋ
@kimn14
4 жыл бұрын
아ㅜ생각지도 못했네요. 결국 민중에 의해 척결되는군요
@user-ws7pv4yo8n
3 жыл бұрын
내가 교과서에서 봤던내용은 궁예는 쫓겨나고 농부들한테 뚜드러맞고 죽었다고 되있음.
@user-nv2rg1ey8n
Жыл бұрын
누구인가?누가 기침소릴 내었는가?
@user-sv9kg1zf4s
4 жыл бұрын
궁예가 도망쳐서 명주김순식한테갔으면 또 비슷하게 싸웠을수도있음 궁예가 한타싸움지고 그냥 쿨하게 ㅈㅈ친거같아요ㅠ
@winnie_love_honey00
Жыл бұрын
김순식에게 갔으면 후삼국시대가 아니라 한반도판 전국시대가 됐을듯...
@TheWjdwhdwo
4 жыл бұрын
댓글먼저 달아요 ㅋ 좋아요는 필수 ㅋ
@user-zs7eb5uc9r
2 жыл бұрын
왕건이 고려사의 서술과는 달리 정권초기에는 환선길 임춘길 이흔암등이 계속 반란을 시도했다는 사실로볼때 마냥 쉬웠던건 아니라고 봅니다.
@user-kb2wq9tz3o
3 жыл бұрын
그냥 도망다니는 신세에 백성들한테 걸려서 맞아죽은걸로 알고잇엇음 ㅜㅜ 드라마 태조왕건은 너무 드라마틱하고 ㅋㅋㅋ
@Cyrilstorm
4 жыл бұрын
역사란게 원래 승자중심으로 기록되다보니 의아한 부분도 적지않아 있는게 사실이긴합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조차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당시의 중국역사서나 혹은 삼국유사를 통해 대조하고 보완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한국사를 만들게 되는거죠. 궁예정권의 몰락도 물론 관심법을 이용한 폭정과 실정도 있었지만 무리한 조세부담이 컸을거라 봅니다. 그래서 왕건이 즉위 후에 조세를 10분의 1로 감하고 세역을 3년간 면제시킨 것도 그걸 덜어줌으로 백성들이 지지하게 된 거죠.
@user-du4gu6fm3z
4 жыл бұрын
아무 이유없이 추천좀 주세요
@user-ls3ml5cd1f
4 жыл бұрын
궁예는.안성죽산이고향이다
@user-xo4px5dk9u
4 жыл бұрын
보리값으로 4달라를 안줘서 맞아죽었다는 설이 있죠
@vedo7065
3 жыл бұрын
궁예는 도적놈의 아버지
@mrboom_p3d
3 жыл бұрын
ㅂrㅂrㅌIㅂI 홍보좀 그만해라 ㅡㅡ 그래서 어디다 검색한다고?
@BeastVanshGaming
3 жыл бұрын
ㅂrㅂrㅌIㅂI 만든사람은 진짜 상을 줘야함 일본 av배우 저리가라하는 한국여자들 다벗네
@qnseksrmrqhr
2 жыл бұрын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qnseksrmrqhr
3 жыл бұрын
왕창근이 햇볕드는 곳에 거울을 걸어 놓자...청목은 송악 흑금은 철원을 뜻하다......드디어 이 거울은 궁예에게 바쳤는데 ...신하들은 당의 상인이 왕건이 왕이 되리라는 말까지 궁예에게 전할 수 없었으며........모든 세력들은 대부분 궁예를 싫어하고 왕건을 좋아하였고....따라서 궁예정권에서는 우리가 크게 득볼 일은 없겠다라며 내란을 계획하였다는 .......궁예는 미복으로 도망치다가 산에 2일을 숨어지내다 내려와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들켜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끝까지 풀리지 않은 문제는 궁예가 내란의 소식을 듣고 싸워볼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도망칠 정도로 약한 조직이 아니었는데 왜 내란을 진압하지 않았을까?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왕건측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게 아니냐?라는 추측이 가능한 정도로 의심되는 부분이다.......민간에서 전해지는 말은 궁예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세가 왕건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음을 알고 왕건에게 왕위를 선양했다는 이야기.......궁예가 마지막까지 왕건과 혈투를 벌이다가 산 속으로 피신하니 산천이 서러워 울어 그 산이름이 명성산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소식들......우리 역사에 민중 출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가처럼 이렇게 왕위에 오른 인물이 극히 드물었다는 ......늘 건강하시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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