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역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되고 아내 정난주와 두살 난 아들 경한은 제주에 관노로 유배 된다. 어머니는 신아의 선조 이벽의 누나이며 거제도에 유배 되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이며 당대의 실학자 정약전의 딸로 교양과 인품을 갖춘 정난주는 뱃길로 유배 되면서 아들을 죄인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사공에게 부탁하여 추자도 작은 섬 언덕 풀밭에 아들을 그곳에 내려두고 제주 대정현 관비로 유배 된다. 정난주는 관비를 관리하던 김씨의 아들을 맡아 양육하고 37년동안 이웃에 사랑과 베품을 전하며 아들과 가족의 아품을 오직 신앙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그의 인품을 존경하고 신앙심도 눈감아 주며 한양 할머니로 따랐다고 한다. 장례식도 치려 주고 오늘날까지 묘지도 돌봐 주고 있었다 추자도에 두고 온 경한은 한 어부의 도움으로 오씨 성을 가진 집안의 아들로 삼아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이가 입은 옷 동정에 부모 아이 이름을 적혀 있어 그의 이름 황경한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김병준.김구정 신부가 대정 김모씨가 관리 해오던 산소를 찾아 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하고 94년에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황사영은 17세 장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는 인제였으나 정조 사후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실상을 기술한 백서를 중국 주교에게 보내고자 하다가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그의 아들 경한은 뱃길에 아파 죽어 바다에 수장 했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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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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