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의 또 다른 밀사, 헐버트
만국평화회의를 앞둔 1907년 5월에 프랑스, 독일, 미국 등 9개 국가를 방문해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한 밀사가 파견됐다.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전권을 위임받은 최초의 외국인인 헐버트였다. 그의 임무는 수교를 맺은 9개국에 대한제국의 현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이목은 대한제국의 편에서 일본의 침략을 비난해 왔던 헐버트에게 집중돼 있었다.
그러는 동안 헤이그에 도착한 세 명의 특사. 고종과 헐버트의 치밀한 계획하에 펼쳐진 교란작전, 헐버트는 세 명의 특사가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파견된 제4의 밀사였다.
헐버트에게 내린 고종의 또 다른 미션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했다.
이에 고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헐버트에게 친서 전달의 임무를 맡긴다. 한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헐버트.
그러나 이미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 밀약을 맺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조선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리고 불과 얼마 되지 않아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이 지휘한다는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고종은 헐버트에게 일본의 무력적 위협 아래 치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효력이 없음을 알리며 미국의 도움을 받아내기를 바랐다.
고종의 내탕금을 확보하라
상해 덕화은행에 예치된 고종의 비자금. 주권회복을 위해 쓰일 자금인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1909년에 헐버트는 상해로 향한다.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이 내린 마지막 밀명이었다. 일본 통감부의 기밀문서와 미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들을 통해 일본과 자국의 대통령을 상대로 한 헐버트의 임무 수행의 과정을 추적한다.
한국을 사랑한 벽안의 스승
조선에 가장 절실한 것이 교육임을 인식했던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이기 이전에 1886년 선교의 뜻을 품고 조선에 온 교사였다. 고종이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재직하며 불과 3년 만에 국한문 혼용이 아닌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제작한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독립신문 발행에도 참여하고 띄어쓰기를 도입했으며 직접 Korean Review를 발행하여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고종으로 하여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외국인 친구가 될 수 있게 하였다.
한국인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우다
1949년 7월, 헐버트는 정부의 초대로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40년 만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긴 여정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둔 헐버트,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평소의 바람대로 한국 땅에 묻혔다. 일본에 의해 무너져가는 대한제국을 목격하고 그 부당함과 억울함을 한국인보다 더 강하게 호소했던 헐버트. 고종의 밀사로 활약했으며 일본에 빼앗겼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되찾고 한국인의 토지를 지키는 등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에 저항했던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헌신적인 삶을 조명한다.
신역사스페셜 74회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꿈 (2011.6.30.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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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егізгі бет KBS 역사스페셜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꿈 / KBS 20101023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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