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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ongolian Railway, TMGR
데카브리스트 Decembrist revolt(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Алекса́ндр Н. Муравьёв)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이라는 결사를 조직했다.[2]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Южное общество),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Северное общество),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대상이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3]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봉기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직접적인 전투를 치르지 않고 무력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약 3천명의 반란군은 허공을 향해 산발적으로 총을 쏘아대며 9천 명에 달하는 충성파 군대와 가만히 대치하였고, 이 소란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데카브리스트들과 교섭을 하기 위해 직접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몇 시간에 걸친 교섭은 아무 소득 없이 결렬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1세가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병 돌격을 명령하여 직접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병 돌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니콜라이 1세는 대포 3문을 동원해 포도탄[4]을 발사하라고 명했다. 이 포격은 광장에 빽빽하게 밀집해있던 반란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반란군은 사기가 떨어져 이렇다 할 반격도 해보지 못한 채 광장에서 도망쳤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였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Негізгі бет [러시아여행] 🇲🇳🇷🇺몽골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7편 시베리아의 파리 이루크츠크 데카브라스트의 꿈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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