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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환을 품은 충주 수안보 미륵대원지
폐사지는 초분(草墳)과 비슷하다. 살이 사라진 자리에 뼈만 남듯, 건물이 무너진 자리에는 주춧돌과 석탑만 남는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은 돌덩이가 눈부시게 빛난다. 삼국이 치열하게 싸운 중원 땅, 지금의 충주 수안보 산자락에 있는 걸출한 폐사지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계립령 하늘재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북쪽 월악산을 바라보는 석불은 마의태자와 얽힌 애잔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도로 옆에 자리한다. 절이 길도 없는 산속에 있지 않고 길가에 자리한 셈이다. 그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길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길은 어디일까? 문헌에 처음 기록된 길은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에 처음 열린 계립령(525m), 지금의 하늘재 이다. 하늘재는 지금의 경상도와 충청북도 사이에 자리한 소백산맥 줄기를 넘어가는 문경과 충주 수안보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하는데 미륵대원지에서 곧바로 연결된다. 미륵대원지 바로 옆에는 고려 시대 원 터가 자리한다. 원 이라 하면 관청에서 공무상 출장을 다니는 관리들이나 이 곳 저 곳으로 장사를 다니는 장사치들이 식사도 하고 숙박도 하는 곳, 즉, 요즘으로 치면 음식점과 숙박시설을 뜻한다. 따라서 미륵대원은 당시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가에 세운 것이다.
미륵대원지는 계단식 구조인데,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완만해서 평지처럼 느껴진다. 한 칸 오르면 당간지주가 누워 있고, 또 한 칸 오르면 거대한 돌 거북(귀부)이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돌 거북의 생김새가 순박하다. 두어 칸 위에 오층석탑이 우뚝하며, 그리고 계속 이어서 일직선으로 석등과 석불이 자리한다. 석불입상 뒤로 후광처럼 돌을 쌓은 곳이 석굴이다. 거대한 돌을 쌓아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셨다. 불상 위로 목조건물이 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똑같지는 않지만 일종의 경주 석굴암 형식의 석굴사원이었던 셈이다.
석불은 절터의 주존불로 높이가 무려 10.6m에 이른다. 커다란 돌덩이 네 개로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는 다른 돌을 썼다. 웅장한 규모와 걸맞지 않게 석불의 표정이 그야말로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 친근함 덕분에 미륵대원지에 얽힌 전설이 힘을 얻는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바로 이 곳 미륵대원지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석불은 신라 수도가 있는 남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덕주사를 품은 월악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향의 절인 셈이다.
미륵대원지를 구경했으면 마의태자의 발걸음을 따라 하늘재에 올라보자. 미륵대원지 입구에서 왼쪽 옆으로 드넓은 원 터가 있다. 원(院)은 관리나 상인이 숙식하던 공간으로 요즘으로 치면 음식점 겸 숙박시설이다. 원 터 뒤로 하늘재 입구가 보인다. 하늘재는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려 시대까지 남북 교통로의 중심지였다. 조선 시대 문경새재가 개통하면서 옛길이 되었지만, 최근까지 사람들이 이용했다.
여기에서 하늘재 정상까지 2km 거리로 40분쯤 걸린다. 길은 부드럽게 산의 품을 파고든다. 졸졸 흐르는 개울을 지나고, 소나무 숲길과 참나무 숲을 차례로 만난다. 연리지와 김연아 선수의 포즈를 닮은 '연아나무'를 지나 모퉁이를 휘휘 돌면 하늘재 정상이다. 정상에서 오른쪽 나무 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면 탄성이 터지면서 하늘이 열린다. 건너편으로 암반이 드러난 포함산(962m)이 우뚝하고, 백두대간 봉우리가 꼬리를 잡고 흘러간다. 이 감동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늘재란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Негізгі бет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환 품은 가볼만한 폐사지 수안보 미륵대원지 a thousand-year-old temple site with traces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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