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불교나 힌두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교에서도 명상은 매우 핵심적인 수양법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유교 명상의 핵심적인 개념을 살펴보고 불교의 명상과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유교 명상은 현대인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유용한 현실적인 수행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출처: 내면소통 660 - 666)
중국은 원래 유교와 도교의 나라다. 중국 불교는 유교 및 도교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왔다. 유교는 송나라 시대에 불교와 도교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성리학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전통 유교가 송나라 유학자 주희에 의해서 성리학이라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철학적 체계와 수행 방법을 갖추게 된 데에는 선불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주희는 학문의 근본 목적이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性)이 곧 이(理)라고 보았기에 주자학(朱子學)을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주자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중요한 방법으로 수양을 강조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안정된 자세를 잡고 눈을 감은 채 내면에 집중하는 명상 수행을 강조한다. 이를 명좌(瞑坐: 눈을 감고 정좌하는 것) 혹은 정좌(靜坐: 고요히 앉는 것)라고 한다. 주자학이 강조하는 수양론 역시 당송 시대에 크게 발전한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불교의 관점과 수행법을 많이 차용하여 성리학 체계를 수립해가면서 동시에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비판함으로써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불교는 단지 마음에 기반을 두고 있고 성리학은 객관적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학문으로서는 성리학만이 유용하다는 것이 주자의 기본 입장이다.
주자의 행적에는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선사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대혜어록》을 가져갔다는 기록도 있고, 《주자어류》에는 주자가 대혜선사를 회상하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주자의 스승인 이통(연평)은 묵조선의 굉지선사나 간화선의 대혜선사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사람이다. 묵조선이나 간화선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살면서도 이연평은 선불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선불교는 일상생활과 단절한 채 칩거하면서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기에 실용적인 학문이 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이라고 본 것이었다. 이연평은 제자인 주자가 당시 송나라에서 한창 유행하던 선불교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는 적극적으로 말리기도 했다.
주자는 그러나 스승의 방법론인 미발체인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는 미발체인을 넘어서 미발함양(未發涵養)을 주장하게 된다. 감정과 마음작용이 정지하는 고요한 그 마음의 상태를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유지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주자는 앉아서 명상할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편도체를 안정화해서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마음근력을 강화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명나라 유학자였던 왕양명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양명학(陽明學)을 제창했다.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性)보다는 마음(心)이 곧 이(理)라 하여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왕양명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나의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런 사물도 없고(心外無物) 아무런 이치도 없다(心外無理)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모든 사물은 인간의 마음과 상호작용을 통해 생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왕양명의 ‘사물’의 개념은 불교의 심적 대상(objects of mind)으로서의 ‘담마(法)’와 매우 비슷한 개념이다.
왕양명은 치양지(致良知)를 이루는 방법으로 다양한 수양법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가 이연평의 전통을 이어받은 묵좌징심의 정좌법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기 어려우니 우선 말없이 조용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는 것부터 훈련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마타(집중)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다음 방법이 성찰극치(省察克治)다. 생각이 일어나는 그곳에 집중해서 반성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일종의 위빠사나(통찰)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묵좌징심과 성찰극치를 동시에 강조했다는 것은 왕양명역시 지관겸수의 불교적 수행 전통에 매우 익숙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치양지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수양법은 사상마련(事上磨鍊)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수행을 의미한다. 경험하는 모든 일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수행을 한다는 뜻이다. 즉 일종의 사띠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왕양명은 불순물을 없애고 순수한 양지만 남도록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수양을 혼자 조용히 앉아서 눈감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오히려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여러 가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는 중에도(事上) 꾸준히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磨鍊)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마음근력 훈련을 혼자 방에 앉아 눈감고 하는 것은 초보 단계이고,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번잡한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근력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왕양명의 불교 비판의 핵심도 “현실적인 삶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라는 입장의 연장이다. 어떤 사람이 “석씨(석가모니)도 마음 수양에 힘쓰고 있는데(釋氏亦務養心),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왕양명은 “석씨는 사물과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하고(釋氏卻要盡絶事物), 마음을 환상으로만 간주하여(把心看做幻相) 점차 허적으로 가버리고 만다(漸入虛寂去了). 결국 현실적인 세상과는 아무런 교섭도 없게 된다(與世間若嫵些子交涉). 그래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所以不可治天下)”라고 답했다. 수행한다고 해서 현실 세계를 전도몽상이라고 보거나 현실과 완전히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723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이 《전습록논변》을 통해 왕양명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비판한 이래 대부분의 학자들이 양명학을 거부하고 정통 주자학에만 매달렸다. 퇴계를 비롯한 조선의 주류 유학자들이 양명학을 비판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불교의 선종과 가깝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자학도 송대의 선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과 왕양명도 여러 차례 불교를 명시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의 양명학 거부는 순수한 이론적인 이유였다기보다는 정치적 동기가 더 강했으리란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즙산은 정좌설(靜坐說)에서 보다 자세하게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행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만약 잠시라도 여유가 생긴다면 우선 정좌해라(日用之間, 苟有餘刻且靜坐).” 따로 수행할 시간을 내는 것보다는 틈나는 대로 수시로 정좌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이야기다. 즙산의 말을 들어보자.
“정좌하는 중에는 본래 어떠한 일도 없으므로(坐間本無一切事) 아무 일에도 마음 쓸 일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卽以無事付之), 마음 쓸 일이 없기에 또한 무심한 상태가 된다(旣無一切事 亦無一切心). 이러한 무심이야말로 본심(본원적인 마음)이다(無心之心, 正是本心). 갑자기 떠오르는 잡생각은 내려놓고(瞥起則放下) 막히고 쌓여가는 집착은 제거해버리면(沾滯則掃除) 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只與之常惺惺可也).”
이처럼 유교 명상에서도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항상 깨어 있는 상태(常惺惺)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즙산 역시 유교 명상은 선불교와 그 방법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이러한 수행기술은(此時伎倆) 눈을 감지도 않고 귀를 막지도 않으며(不合眼 不掩耳), 가부좌를 틀고 앉지도 않고, 수식관을 하는 것도 아니며,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도 아니다(不跏趺, 不數息, 不參 話頭).”
즙산은 자기가 강조하는 정좌법이 바깥세상과 단절하여 수행에만 몰두하는 선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다만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는 것이다(只在尋常日用中). 정좌하다가도 지루하거나 피곤해지면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일어서면 되고(有時倦則起), 혹시 정좌가 잘되어서 뭔가 느낌이 오면 계속 그것에 응해서 따라가면 된다(有時感則應).” 명상이 잘 안 되는데도 억지로 참으면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잘되는 날은 더 열심히 하면 되고, 안 되는 날은 그냥 계속 앉아 있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즙산에 따르면 정좌는 반드시 앉아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늘 명상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오고 가거나 앉거나 누워 있을 때에도 늘 좌관을 행할 수 있으며(行住坐臥, 都作坐觀), 먹거나 쉬거나 기거할 때에도 늘 정좌 상태에 있을 수 있다(食息起居, 都作靜會).”
묵조선이나 화두선의 수행법을 강조하는 선불교는 현실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고 허적에 빠지는 것이라는 유교적 관점에서의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한 면도 있다. 그러나 고타마가 가르쳤던 원래 수행법은 유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 자체가 수행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
#내면소통 #명상 #내면소통명상 #불교명상 #유교명상 #선불교 #성리학 #주자학 #왕양명 #양명학
Негізгі бет 유교의 명상법
Пікірлер: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