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여 있는가? 정결한 가?
창세기 6장 1~5절
• 창세기 6장 1~5절 "섞여 있는가? ...
💻 꼭두새벽묵상 No. 1331
작년 이맘 때 쯤 마을입구 골목은 침수된
가재도구로 가득하였고
해발 300고지의 마을 일부는 저지대 침수마을이
되고 말았었다.
다행히 올해는 그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지
않아서 감사하다.
이번에 내리는 비는 그래도 얌전한 비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이지 작년같이 내렸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새벽2시에 마을 의용소방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토사와 바위가 흘러 내려와 길이 끊어졌다고
트렉터로 길을 좀 열어달라고 요청이 왔었던
것이다.
그때 귀찮은 부름이 아니라 쓰임받는 부름이라
한밤중이지만 감사했다.
교회안에서만 쓰임받는 목사이기 보다는
마을속에서 뭔가 의미를 감당하는 사람이
된 것이 감사했던 이유였다.
작년에 내렸던 비는 그 세력이 대단했었다.
이번 장마에 내리는 비......
계속 긴급 재난 문자가 날라오고 오늘
새벽에도 긴급재난 문자가 왔어도
창세기의 시계가 가르키는 비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천지창조와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사람이 범죄하는 과정...
그리고 4장에서 첫 사람 첫 부부가 낳은
아이들의 제사와 인류최초의 살인사건
5장에서는 아담의 족보
순탄한 진행과정으로 보인다.
창세기다운 전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반전이 시작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5장에서의 분위기가 누가 누가 잘하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름처럼 누가 누가
더 오래 사는가...?
이런 모양새로 지금의 인류수명과는 상상이
안 되는 나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창세기의 모니터에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한 때라고 하는 이 6장의
말씀을 띄우고 있다.
이렇게 사람이 많아진 상황을 성경은
좀 특이한 표현, 뭔가 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포문을 열어가고 있다.
6장 1절 서두의 문장속에서 우리는 다음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했을까?
어떻게 갑자기 땅 위에 사람이 번성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사람이 많아지게 된 이유가 궁금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한다는 것...
지금 인구 절벽을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이 말씀은 어쩌면 딱 나의 세대 정도까지만
이해되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나의 아들 세대 소위 말하는 MZ세대의 사람들은
그 때 사람들은 미련했나봐...
심하게 말한다면 그 시절엔 동물농장이었나봐....
왜 그렇게 많이 나았어?
어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형제간이 6남매로 자라왔기에 그래도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라는 말이
조금 이해가 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의 이해도
특히 성경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질수 있는 것이다
경험치를 의존하기 쉬운 인간들이 케논의 말씀
정경의 말씀인 성경
쉬운 말로 표현을 한다면 기준이 되는 성경
잣대가 되는 성경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 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에 의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내 안에 꿈틀거리는 성경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이미 번성했다는 말이 아니라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말로 새로운 반전을 제시하는
문장이다.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답이므로 우리는 이 번성의 시작을
창세기 1장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 천지창조를 다 마치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로 창세기 1장 28절에서
말씀하신 그 결과물이 아닐가 생각된다.
창세기가 가르키고 있는 또 하나의
모니터에는 인류는 생육과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이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뛰우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들....
흔히 아담의 계보를 말하는 이 5장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 열거된 많은 이름이 진짜
아담의 계보를 말하기 위함인지.....아니면
이 사람들의 수명을 말하기 위함인지...
알송달송하다.
계보를 말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몇 살을
살았다는 것을 기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에도 누구 할아버지가
얼마를 살았다는 것은 없다
이름만 나오고 있을 뿐이지....
성경에는 여러곳에서 계보, 족보에 대해서
기록이 되었는데 이 창세기 5장과 같은
방식의 기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세기 5장의 기록방식 즉
사람이름과 살았던 수명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이 이름만 이야기 하지 않고 나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수명을 일정한 기간
동안 길게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주석을 보고 학자들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적어가는 묵상글은 언제나 내가 본
성경을 내가 성경만을 들여다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적는
글이기에
학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는 것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설교 도중에
어떤 학자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정도만 안내하고 마는 것이지
학자들이 말한 것만 꼭 정답이 아니기에
언제나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에는 최고의
방법은 성령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다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할 바로 그때 오늘 6장
1절의 모니터는 또 다른 문장하나를 가르키고
있다.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그냥 딸이 아니라 딸들이라고 복수형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라는 문장으로 1절의 말씀을 반전시켜주고
있다. 뭔가 암시하는 것이 가득한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그들의 딸들 즉 사람의 딸들로 인해
창세기에 살았던 인류에 어떤 반전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절의 말씀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이 말씀과 대조 되는
말씀이 2절에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러니까 창세기 6장의 모니터에는 커다란
두가지 중심키워드가 뜨는 것이다
사람의 딸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
성경해석에 난해한 부분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문장이다.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경건한 셋 계열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첫 사람의 타락이후 창세기의 모니터에는
가인과 아벨이라고 하는 아담의 아들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형제간에 야곱처럼 형을 속여 축복을
빼앗은 것도 없는데
형은 동생을 죽이고 마는 그 사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아들 되신 하나님은 셋이라는
자녀를 허락해주시는 것이다
이후로 인류는 가인 계열의 사람과
셋 계열의 사람을 나뉘어 지게 된다.
어성경저자 이애실 사모는 재미난 표현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힘있는 사람이 왕이 되는
가인 계열과
창조주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셋 계열로
나누어진다는 표현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셋 계열이 그만 섞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이 왔다는 것이고
그 심판은 노아 홍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애실 사모의 이 말에 나도 공감이 된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가 섞이는 문제이다.
가인계열 셋 계열 굳이 나누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떤 가문 어떤 계열인가 보다
바울이 말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나
시민권이 없는 사람이나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섞인 사람인가
아니면 정결한 자인가 이 문제라고 본다.
세상을 살면서 믿음의 정절을 지킨 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오늘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뱀같이 지혜로운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오늘 내 신앙이 오직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과 주님 돈과 주님
명예와 주님 이성과 주님
두 마리 토끼를 다 붑잡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지라
결국 이 문제로 3절에 인류의 수명은 120세로
급속하게 줄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섞임을 통하여 결국엔 5절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섞임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악이 가득하게 되었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결한 삶을
위해서 레위기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도 쫓아내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은 섞여서는
될 일이 아니기에 정복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영적 정복 전쟁중에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내 신앙이
내 삶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신앙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Негізгі бет 창세기 6장 1~5절 "섞여 있는가? 정결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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