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광천부원군파 수원종회 여선조 선영
어모장군(禦侮將軍) 선전관공(宣傳官公) 휘여(諱呂) 묘갈명(墓碣銘)
부군(府君)의 휘(諱)는 여(呂)요 자(字)는 유진(有振)이니 광주인(廣州人)이다. 이씨(李氏)는 고려(高麗) 국자생원(國子生員) 휘 당(唐)에서 비롯하였는데 아들 오형제를 두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드님 휘 집(集) 호 둔촌(遁村)께서는 둘째인데 학문과 지절(志節)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인데 처음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이분이 휘 지직(之直)을 낳으니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에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며 청절(淸節)로 이름을 날려 청백리(淸白吏)에 입선(入選)되었다.
이분이 휘 인손(仁孫)을 낳으니 호는 풍애(楓崖)요 우의정에 시호(諡號)는 충희(忠僖)시다.
충희공께서 아들 다섯 분을 두시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니 이로써 광리(廣李諱)에는 양대(兩大)에 걸쳐 오자등과(五子登科) 하였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휘 극증(克增)은 셋째인데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고, 익대(翊戴)와 좌리(左理) 두 공신에 책훈(策勳)되어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공장(恭長)인데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광천부원군(廣川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으며 국가의 문물제도(文物制度)에 기획(企劃)한 바가 많았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오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세홍(世弘)이니 여러 곳의 주목(州牧)을 거쳐 벼슬은 선공감정(繕工監正)에 이르렀고, 증조의 휘는 복신(復新)이니 군수(郡守)이며 조(祖)의 휘는 선경(善慶)이니 진사(進士)요 고(考)의 휘 수강(壽岡)은 서사(筮仕)하여 예빈시 별좌(禮賓寺別坐)이며 비는 공인(恭人) 연일정씨(延日鄭氏)이시다.
부군께서는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석대(碩大)하고 힘이 무척 세었으며 겸하여 특이한 재주가 있어 겨우 서당에 입학하자마자 힘써 가르치지 아니하여도 학문은 날로 진취(進取)하였다.
약관(弱冠)에 여러차례 과장(科場)에 나아갔으나 번번이 유사자(有司者)와 연줄이 닿지 않아 실패하고 마침내 문과로 출세할 생각을 그만두고 무과(武科)로 발신(發身)하여 맨처음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는데 왕명(王命)을 봉행(奉行)함에 있어서 근실하고 치밀하여 추호의 착오도 없으니 상(上)께서 극히 가장(嘉獎)하시고 다른 직책에 옮기려 하시지 않아 여러 차례 외직(外職)을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윤허(允許)치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구품(九品)의 부위(副尉)에서 삼품(三品)의 당하관(堂下官)에 이르도록 시종 한 관사(官司)에서 근무하였으니 신하된 도리에서는 당연하다 하겠으나 부군 자신에 있어서는 매우 괴롭고 싫증이 나는 일이었다.
그럴 즈음 세상은 날로 잘못 되어감을 보시고 수성(隋城-수원의 古號)으로 물러나셔 노년(老年)의 계책을 세우시면서 이르기를 “조정 반열에 따라다니면서 왕사(王事)에 골몰(汨沒)하는 것이 어찌 초야(草野)에서 정양(靜養)하면서 나 하고 싶을대로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는 세상과는 담을 쌓고 들어 앉아 날마다 경전(經典)만을 탐구하되 성리(性理)의 오묘(奧妙)한 이치와 사(邪)되고 올바름의 분별에 주안점(主眼點)을 두었으며 때로는 그 지방의 사우(士友)들과 만나 여택(麗澤-친구간에 문답하면서 공부를 쌓는 일)의 보람을 넓히면서 끊임없이 연구하니 조예(造詣)가 날로 깊어져 마침내는 문장이 훌륭하고 고상하게 되어 원근(遠近)에서 추중(推重)한 바 되었으나 스스로는 장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또 자못 거두어 두지도 않으면서 이르기를 “세상에는 성현(聖賢)의 글 몇 편(篇)만 있으면 되었지 구태어 많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시문(詩文)을 접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자손된 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우유(優遊)하면서 오직 꽃씨나 심고 대나무를 가꾸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며 자질(子姪)을 가르치고, 남을 깨우침으로 낙을 삼고 지내시다가 일조에 병을 얻어 물이 자자지듯이 서거(逝去)하셨으니 바로 강릉(康陵-명종의 능호. 따라서 본문에서는 명종때라는 뜻임)때의 일이다.
용인 내지면 동막(龍仁內枝面東幕)의 자좌원(子坐原)에 장례모셨는데 지금의 수원시 이의동 산 99번지이고 배(配) 숙인(淑人) 김씨(金氏)를 합장하였다.
1남을 길러 자승(自昇)인데 벼슬은 하지 않았고 손자 동백(東白)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며 증손 임(林)은 부호군(副護軍)이고 현손 시발(時發)도 부호군이다.
외손은 기록하지 않았다.
또 여기에 삼가 자손중에서 관직을 가졌던 분들을 간추려서 후면에 싣기를 5대손 태중(泰重)은 문과(文科) 감찰(監察)이오, 6대손 형기(亨基)는 문과 전한(典翰)이며 평기(平基)는 동지중추부사요 정기(正基)는 통덕랑(通德郞)이며 장기(章基)는 선무랑(宣務郞)이다.
7대손 진방(鎭邦)은 증 공조참판(贈工曹參判)이오 진춘(鎭春)은 통정(通政)이며 진빈(鎭彬)은 증 가선(贈嘉善)이다.
8대손 지회(智會)는 무과 우후(虞候)에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이오 완회(完會)는 남부도사(南部都事)이고 또 한분의 완회(完會)는 통정(通政)이다.
9대손 병호(秉浩)와 병준(秉俊)도 통정이고 병규(秉圭), 병주(秉周) 병조(秉祚)는 모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며 병목(秉穆)은 통덕랑이오 병학(秉學)은 오위장(五衛將)이다.
10대손 기래(驥來)는 통덕랑이오 덕래(悳來)는 선전관이며 학래(學來)는 육군부령(陸軍副領)이다.
오호(嗚呼)라 부군께서 몰(歿)하신 지금 400년이 되었으나 묘정(墓庭)에는 일편석(一片石)의 표갈(表碣)도 없으니 자손들의 한(恨)이 쌓인 지 이미 오래이다.
어느날 첨의(僉議)가 크게 일어 불초(不肖)한 이 사람더러 부군의 평생(平生)을 간추려서 기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굳게 사양하기를 누누히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삼가 보책(譜冊)과 실록(實錄) 및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사실을 상고하여 우(右)와 같이 서술(敍述)하는 바이다.
이어 명(銘)을 달기를
부군의 본 마음은,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조용함을 즐겼는데,
오직 본원(本源)에 힘쓰시니,
온갖 행실 올바르게 되었다네.
자기복 다 누리지 않고,
법도(法度)를 전함이 정녕하였는데,
한이 쌓인지 이미 오래인지라,
눈물을 훔치면서 이 명을 짓노라.
一九九八年 戊寅 五月 日
12대 손(孫) 후재(厚載) 경선(찬)(敬撰)
방예(傍裔) 명래(明來) 근서(謹書)
광천부원군파(廣川府院君派)수원종회(水原宗會) 근수(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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