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각도의 지휘관과 연합하여 한양 탈환을 목표하였다.(6월 5일 음력)
"참고 모은 병력의 규모가 (5만~) 8만에 가깝다. 이제부터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것이며 그 중심에 나 이광이 있을 것이다!"
이광은 이 전투에서 불명예를 씻어야 했다.
그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고 한양을 점령하는 20일 동안 사실상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도는 있었다. 5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한양 방어를 위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북으로 도망가고 한양이 점령되자 그는 다시 전라도로 돌아갔다.
선조는 대로 하였다.
"왜놈의 공격도 없어 병력도 온전하고,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라 양식도 넉넉한데
한양을 뺏기는 20일 동안 전라도관찰사라는 자가 도대체 뭘 한 것이야?"
평소라면 불러들여 족쳐야겠지만 워낙 위급한 상황에 지휘자를 함부로 바꿀 수도 없었다.
하여 선조는 이광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군을 이끌고 한양을 수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광의 무능력을 질책하곤 한다.
사실 이광으로서도 억울한 면은 있다. 경상도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도 몰랐을 것이고 수많은 장수들이 달아나버릴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 불렸던 신립도 비참하게 패하였다.
왕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이런 상황에 이광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순신과 곽재우처럼 활약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넘사벽 장수들...
옆집 학생은 전교 1등 하는데 넌 왜 그렇게 못하냐는 질책과도 같을 것이다.
어쨌든 이광은 이번에는 명예 회복을 해야 했다.
다시 군사를 모아 한양 탈환을 목표하였다. 이광이 군사를 모은다는 소식에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 경상도 순찰사 김수, 광주목사 권율등 각지의 군관들이 합류하니 병력은 5~8만에 이르렀다.
이렇게 모인 군사들을 삼도근왕군이라 불렀다. 마치 후한 말 동탁을 치기 위해 유비 조조 원소 등 전국 각지의 실력자들이 연합하는 모습과 같았다.
Негізгі бет [팩 한국사 301회] 용인전투에서 무슨일이 있었나? feat 이광이 억울한 이유
Пікірлер: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