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은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결정적 결과를 낳았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지휘관급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으로 추측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극노하였다.
"어찌 그 작은 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한 것이냐? 진주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공격하라! 함락될 때까지 계속 공격하라
그리고 진주성주(김시민)의 목도 베어와라!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내가 좀 봐야겠다."
권율은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0,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독성산성으로 들어가 한양에 주둔한 왜적들의 연락망과 보급을 끊을 것이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드디어 여진족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맹장 이여송이 군사 43,000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음력 12월 25일)
"내 고조부께서도 조선 사람이셨으니 이 전쟁은 내게도 의미가 있다.
하... 왜놈들 때려잡기에는 딱 좋은 날씨가 아닌가?"
그렇게 임진왜란의 전세는 바뀌고 있었다. 이순신과 여러 의병장들의 활약, 김시민의 진주성 사수, 권율의 북상 거기에 명나라의 참전까지..
한양에 주둔중인 일본군 제 8번대의 수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특히 권율이 신경쓰였다.
"조선군이 독성산성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보급이 위태로워진다. 날은 추워졌고 식량도 떨어졌다 무슨일이 있어도 독성산성의 조선군을 몰아내야 한다."
이에 우키다 히데이에는 군사 2만을 뽑아 독성산성을 공격하게 했다.(1592년 음력 12월 11일)
독성산성은 삼국시대 때에도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가 빈번히 발생했던 군사적 요충지로 함락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산성이었다.
일본군 역시 아무리 공격해도 성은 끄덕없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난공불락의 성이란 딱 저 성을 두고 하는말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군만 다 상하겠다.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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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егізгі бет [팩 한국사 311회] 독성산성 제4차 평양성 전투 feat 남자에게 세차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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